《메모장을 뒤지다 은폐워드에서 썼던 소재를 발견해서 조금 다듬어 일반워드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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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외조사로 많은 동료들을 잃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간 조사마다 나온 사상자들의 배에 달하는 인원을 잃었다. 기행종 거인과의 끔찍했던 조우는 조사병단에게 악몽이 되고 말았다.
나는 이번 조사 때 나름 베테랑임을 인정받아 좌익 후열 쪽 반장을 맡았었다. 하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나를 제외한 모든 반원이 전멸하고 만 것이었다. 신뢰하며 따라준 후배들, 티격태격 다투면서도 가깝게 지내던 동기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내 시계가 멈춘 것 같았다. 살려달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이명처럼 귀에 남았고 눈을 감으면 거인에게 먹히던 동료들이 그려졌다. 그 탓에 나는 며칠 내내 아무것도 못하고 멍해있었다. 그런 내가 걱정되셨던 병장님은 휴가까지 내면서 내 옆을 지키고 계셨다. 하루종일 멍하게 허공을 쳐다보는 나를 병장님은 얼마나 불안하게 생각하셨을까. 그래, 나는 병장님께 정말 못된 짓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는 죄책감에 사로잡혀서 공포에 시달리고 있었다. 지옥으로 간 동료들이 내 발목을 잡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왜 한 명이라도 구해주지 못했을까?
자꾸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어떻게든 구해줄 수 있었던 동료들을 생각할 때마다 옷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병장님, 저. 목욕하고 올게요."
찝찝했다. 몸과 마음이. 젖어버린 옷 때문인지, 자책 때문인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싶었다.
병장님은 침대 옆 의자에 앉아 독서 중이셨다. '목욕을 하고 싶다'는 내 말에 황급히 고개를 든 병장님이 현관 앞을 가리키셨다.
"...목욕물 데워 왔으니까 방에서 해."
그제야 현관 쪽에 목욕통이 놓여져 있었다는 걸 눈치챘다. 아까 잠시 병장님이 나갔다 오셨던 게 이것 때문이었나 보다.
"그럼 병장님은..."
"집무실에 잠깐 있다 올테니까 편하게 하고 있어."
살짝 내 머리를 쓰다듬고 병장님은 일어나 문 밖으로 나가셨다. 사실 목욕할 기분은 아니었지만 일단 이 찝찝함을 없애고 싶었다. 병장님이 나가시자 마자 옷을 벗고 목욕통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발목부터 천천히 몸을 목욕물에 담갔다. 조금 식어서 미지근해진 물 속으로 몸이 깊이 잠겨 들어갔다. 그 때 낮아진 시야 속에서, 내 눈에 닿는 것이 있었다. 침대 밑에 떨어져 있는 병장님의 나이프. 나는 그걸 보고 목욕통에서 나와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뚝뚝 물이 계속 떨어지고 있었는데도 개의치 않고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놓여진 나이프를 쥐었다.
각도가 바뀔 때마다 반짝하고 빛을 내는, 날렵한 나이프날에 보기만 해도 오싹 소름이 돋았다. 이걸 손목에 가져다 대면... 정말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죄책감이 의식을 무뎌지게 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자해를 생각하고 있었다. 자살까진 아니라도 내 몸에 고통을 주면 죽은 동료들이 용서해주지 않을까 하는 미친 생각이었다.
그렇게 나는 나이프를 들고 다시 조심히 목욕통에 들어갔다. 하지만 막상 칼을 드니 무서웠다. 한참을 칼만 쳐다보고 멍해 있었던 것 같다. 얼마간을 그러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칼을 손목에 가져다 댔다. 미지근한 물의 온도와 다르게 서늘한 칼이 손목에 닿자 움찔 몸이 떨렸다. 아까보다 훨씬 두려웠다. 또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다가 나이프를 깊숙하게 들이 밀었다.
"아!" 하는 짧은 비명 소리가 저절로 새어나왔다. 혹여나 밖에서 누군가 들을까 입술을 깨물고 나이프를 더 밀어 넣었다. 많이 아프다, 그런데도 왜인지 모를 쾌감이 함께 들었다. 더욱 힘을 주자 나이프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면서 피가 스르륵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흘러나오는 피를 보자마자 무서워진 나는 이내 나이프를 던져 버렸다.
챙강- 나이프가 가벼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고, 그와 동시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아마 너무 망설인 탓에 시간이 오래 지나버린 탓일거다. 병장님은 내 모습을 보고는 잠시 멈춰서서 놀란 표정을 하셨지만, 곧 성난 발걸음으로 내게 다가와 손목을 홱 잡아 채셨다.
"(-)!"
"벼, 병장님.."
피는 심하진 않았지만 흉터가 질 것 같았다. 병장님이 급하게 연고를 찾으시는 듯 했지만 이 방엔 아무것도 없었다.
"젠장."
짧게 읊조리신 병장님은 이내 내 손목에 입을 가져다 대셨다. 살이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병장님의 혀가 내 손목에, 그리고 빨리는 느낌에 살짝 소름이 돋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나는 슬쩍 병장님 얼굴을 보았다. 처음에는 분명 화난 것 같았지만 지금 병장님 표정은, 조금 쓸쓸하면서 슬픈 표정이었다. 그걸 보고 있으려니 내가 더 슬퍼지는 기분이었다.
"더 그을 용기도 없으면서 감당 못할 짓만 하는군."
이내 병장님의 입술이 떼어졌고, 손목에는 약간 붉은 자국이 남았다. 쓰라린 느낌에 저절로 미간이 찡그려졌다. 나는 다시 병장님을 바라보았다.
병장님은 여전히 같은 표정을 하고 계셨다. 무어라 이 일에 대한 변명조차 할 수 없게, 무거운 분위기가 지속되었다. 내 손목의 상처를 지그시 쳐다보면서 병장님이 입을 떼셨다.
"....놀랐다."
"......"
"너마저 어떻게 되어버렸다면 난,"
병장님이 조그맣게 한숨을 쉬셨다.
"병장님..."
"일단 옷부터 입어. 의무실에서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으니 말이다."
병장님이 바닥에 널린 옷가지들을 주워 내게 건네셨다. 미세하게 병장님의 팔이 떨리고 있다는 겻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순간 정신이 바짝 들었다. 나는 병장님에게 굉장히 나쁜 짓을 하고 있었다는 걸 그때서야 알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