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댁 시골가면 만날 수 있는 오빠가 있었어.
시골엔 자주 갈 수가 없으니까. 가끔 방학때나 아님 추석, 설날같이 명절에 찾아갈때면 소저 왔냐고, 오빠는 아닌척 우리 할머니댁을 찾아와서 인사를 하고 가곤 했지.
가끔 그렇게 시골에 내려가서 몇밤 자고오는 날이면 그게 그렇게 좋을수가 없었어.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뭣보다 오빠랑 놀 수 있었으니까. 그런 날이면 밤늦게까지 동네에 있는 내 나이 또래애들 전부 모아서 다같이 놀고... 어렸을땐 다들 쉽게 친해지고 그러잖아. 진짜 재밌었는데. 오빠가 정말 많이 놀아줬지.
가끔 우리를 모아놓고 오빠얘기를 막 해주기도 했었어.
오빠가 옛날엔 진짜 유명한 칼잡이였대. 이름만대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대. 못된놈들은 오빠만보면 도망가고 뭐 종남? 거기 사람들은 오빠한테 택도 없었다는거야. 지어낸이야기인거 누가몰라? 근데 그 이야기들이 그렇게 재미있었다. 꼭 진짜같았어.
얘기를 들을때면 상상해보곤 했지. 이야기 속 어느 장군처럼 칼을 들고 나쁜 사람들을 무찌르고 다니는 오빠. 그게 꽤 멋있어서.
그리고 가끔 폐가에도 놀러다니고, 불장난도하고. 오빠가 알려줘서 칼싸움도 몇번 하고. 사실은 오빠가 준 술도 조금 맛보고... 또 산속도 마음껏 누비고.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애들끼리 하기에는 되게 위험한일들인데, 이상하게 오빠가 있으면 별로 무섭지도 위험하지도 않을 것 같았어. 우리한테 오빠는 그런 존재였거든. 가끔 못미덥지만 믿고 따르게 되는 존재.
어린맘에 오빠를 좋아한애들도 있었지. 근데 그때마다

" 니들같은 병아리들 데리고 뭘 하겠다고. "
자기는 도사라서 연애안한다는둥, 능청스럽게 넘겨버렸어. 진짜 이상한 오빠였어.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따로 있어.
아무도 모르는데. 나는 봤거든.
언젠가 보른달이 뜨던 날 밤에. 밤에 자다가 쉬가 마려워서 자다말고서 깨서 슬그머니 방을 빠져나온 날이었어. 밤에 시골 화장실은 무섭잖아. 너무 어둡고. 뭐라도 튀어 나올 것 같고. 그래서 웬만하면 참는데 그날은 도저히 방광이 터질 것 같았지. 그래서 화장실을 가는데.

저 멀리 누가 서 있는거야.
누구지...? 생각하면서도 일단은 화장실이 급하니까 화장실을 갔어.
그렇게 화장실을 다녀와서도 보는데 아까 본 뭔가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거야. 이쯤되면 잠이 다 깨버렸지. 무서웠어. 달빛만이 어슴푸레한 새카만 밤. 주위에는 아무 소리도 안 들리고. 너무너무 무섭지. 그런데 궁금하잖아. 어린 호기심이란게 뭐겠어. 지금 생각해보면 어디서 그런 치기가 올라왔는지 모르겠다. 그 사람한테 다가갔지.
귀신이 아닌거면 다행이고 귀신이면... 귀신 봤다고 자랑이나 하지 뭐.

거기 있던 건 오빠였어.
처음보는 옷을 입고, 그 자리에 서 있었어. 옆구리에는 칼을 찬 채로. 그 모습이 줄곧 오빠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혼자 생각했던... 내 상상속의 '장군' 인 오빠의 모습 그 자체여서 오빠를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지.
내 목소리에 이쪽을 돌아본 오빠는 날 발견하곤 옅게 웃었어.
"오빠 진짜 멋있어."
"그으래?"
칼도 한번 슥 빼서 보여주더라. 진짜 웃겨.
오빠는 그 큰 손으로 내 머리에 손을 얹고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었어. 오빠의 큰 손... 툭툭. 내 머리를 가볍게 손으로 주어번 손바닥으로 두드려 준 오빠가 말했어.
"부모님 말씀 잘듣고."
"또 아프지말고."
오빠 어디가? 그렇게 물어보면 오빠는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어. 왠지 영영 못 만날것만 같아서 가지말라고 옷자락을 붙잡으면 잠깐 날 빤히 보다가 내 손을 옷에서 살짝 떼어내더라.
" 재밌었다. "

그렇게 정신을 차려보면 병원이었어. 열병으로 삼일밤낮을 의식 차리지못하고 있다가 가까스로 깨어난거야. 엄마랑 할머니가 깨어난 나를 보고 엄청 울었어. 아직 약기운이 다 가시질않아 멍한 귓가에 할머니가 울면서 하는 말씀이 들렸어.
" 검존께서 지켜주신거야... 감사합니다. "
어린애 혼자 밤에 어딜나갔는지 나갔다가 마을 어귀에 쓰러져있는걸 옆집 할아버지가 발견했었대. 마을은 난리가 나고 부모님과 할머니가 걱정을 많이 했다더라.
이건 나중에 들은 얘긴데 지금 우리 마을이 있던곳은 아주 예전에 '화음'이라는 마을이 있던 자리였대.
내가 태어나기도 전, 저 먼 과거시절에는 세상에 못된것들이 너무 많아 그걸 잡으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해. 몇번의 크고 작은 전쟁과 몇몇 영웅들의 활약으로 그것들은 세상에서 모두 멸했다고...현대에 와서는 이젠 더 이상 그런것들을 찾아볼 수 없지만, 할머니댁이 있는 이런 시골에선 가끔 그때 당시의 옛날 영웅들을 기리고 그들에게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빌기도 했다는거야.
병원에서 퇴원하곤 할머니의 뜻으로 그 영웅들에게 인사를 하러 마을 사당을 찾았어.
할머니가 그랬어. 그분들이 지켜주신게 분명하다고..
梅花劍尊 靑明. (매화검존 청명.)
위패에 적힌 이름들 중
유독 그 이름만이 선명했던 기억이 나.
집으로 돌아오는길엔 할머니한테 오빠 얘기를 했어.
그런데 할머니께서는 이 마을에는 젊은청년이 살지 않는다고 했지.
돌산 가까이 있는 험한 시골마을이라 아주 오래 지낸 노인이거나, 그들의 자식이 가끔 찾아오는게 아니라면 내가 이야기하는 그런 젊은 사람은 살지 않는다고.
그러고보면 이상한거야.
오빠네 집에는 한번도 놀러가 본 적이 없었네. 내가 매년 하루가 다르게 커 갈때, 오빠는 나이를 먹는 것 같지 않고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였지. 어린아이들에게만 보이고 어른들과 왕래하는 모습을 보여준적이 없었어.
지금 그 당시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그마저도 다들 드문드문 기억할 뿐. 아무도 오빠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은 없어.
그 날 이후로 두 번 다시 오빠를 만난 적도 없어.
하지만 나는 기억해.
그 날. 새하얀 옷을 입고 달빛아래 서 있던 오빠의 뒷모습을.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그 손길의 온기를.

오빠는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그곳을 지키고 있는거야.
화음이 있는곳엔.... 화산이 있고. 화산이 있는곳엔 靑明이 있으니까.
이제 나는 어른이 되었고, 그 날 그 때 이후로도 시간이 무척 많이 흘렀어. 더 이상 그 마을에 남아계시는 친인척이 안 계시기에 더는 찾아갈 일이 없지만... 가끔 생각해.
오빠는 여전히 거길 지키고 있을까. 여전히 그 자리를 찾는 어린아이들을 가끔 놀아줄까.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얘기해봤어. 이제 곧 10월도 다 끝나가니까.
오빠 생일이 10월이라고 했던게 기억나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