名前:리바이

거인 토벌수 : 8구

병장님이 좋아요

고요한 밤이었다.

끼익- 끼익- 조용한 와중 삐거덕대는 의자 소리에 왠지 모를 이질감이 느껴졌다. 나는 책상에 앉아 한창 일기를 쓰고 있는 중이었다. 문득 조사병단이 위험한 곳이니 만큼 나도 언제 죽을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무작정 펜을 들어 일기를 써 내려가고 있던 것이었다.

"3월 31일 토요일."

펜이 닿는 곳에 내 목소리가 잔잔히 울려 퍼지며 한 자 한 자 채워진다. 절반 가량 채워지자 더 이상 채울 게 없어 오늘 하루를 되돌아 보았다.

'별 일 없었지, 신병들 훈련 교관이었고. 오늘 밥은 샐러드라서 별로였고. 아, 진짜 내 인생 재미없구나.'

갑자기 서글픈 느낌이 들어 창문을 쳐다 보았다.
재미없는 인생, 하고 싶은 건 많은데 막상 무엇부터 해야 할 지 모르겠다. 당장 내일이라도 죽을 수 있는데 나는 허무하게 시간만 보내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 한 구석이 답답해지고 있었다.

'내 삶은 왜 이리 허무할까.' 그 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간다." 병장님 목소리. 구두 굽 소리가 낮고 웅장한 떨림을 주면서 가까이 다가왔다.
늘 노크는 두어 번. 노크 후에는 대답이 없어도 확 문을 열고 들어 오시는 병장님.

"오셨어요, 어쩐 일로? 시간이 늦었는데."

"뭐하는 거냐." 병장님은 내 질문을 회피하시며 내 일기장으로 시선을 주신다.

"일기 써요." 나는 다시 펜을 쥐었다. 잉크를 촉에 묻히고 다시 일기장을 채워 나간다.

"밖으로 나와." 병장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네? 지금 새벽인데, 밖은 왜...?"

"줄 거 있으니까. 밖에 나가서 잠깐 기다려라." 병장님께서는 이윽고 황급히 문 밖을 나가셨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스친다. 쌀쌀하지만 상쾌한 이 공기가 정말 좋아서, 추움에도 불구하고 계속 찬 공기를 들이 마셨다.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동그란 보름달이 꽉 차서 눈부시게 빛을 내고 있었다. '오늘이 보름달이 뜨는 날이었구나. 너무 예쁘다...' 내 생애 이렇게 예쁜 달은 처음이었다.

"(-)." 뒤에서 나를 부르는 병장님의 목소리에 홱 뒤를 돌아보았다.

"...병장님? 이게 뭐에요?" 병장님은 한아름 꽃을 내게 안겨 주셨다.
분홍색 꽃 송이가 너무 많아 셀 수가 없었다. 영롱하면서 맑은 빛을 머금은 꽃들은 장미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달빛을 받아 더욱 환하게 빛나고 있는 꽃들.

"리시안셔스다." 병장님께서 천천히 내 눈을 마주 보셨다.
"리시안셔스의 꽃말은,"

"변치않는 사랑." 나는 동시에 꽃 사이에 숨겨진 반지 하나를 찾아냈다.

"결혼하자. 네 꿈, 내가 이뤄주기로 약속했지. 비록 하나. 거인들이 박멸되면 결혼하자는 약속은 못 지켰지만 내 가족들은 내 목숨과 맞바꿔서라도 지키고 싶다."

병장님의 말씀에서 잔잔한 떨림이 퍼져나왔다.

"널 닮은 아이를 낳고, 누구보다 행복해 하는 네 모습을 보고 싶고, 너와 함께 잠들고 일어나 하루를 맞이했으면. 이런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너무 이른 것 같기도 하고 늦은 것도 같지만. (-), 결혼하자."

다시 한 번 '결혼하자'는 말이 나왔을 때 나는 와락 병장님의 품에 안겼다.

"좋아요...행복해요.... 제 결혼 상대가 병장님이라서, 그리고 변치않는 사랑을 약속해주셔서."
병장님은 멋드러진 미소를 지으시며 내 입술로 천천히 입을 맞추셨다. 달콤한 키스, 정신이 아득해질 것 같았다.

"반지." 입을 떼고 나서 병장님께서는 꽃 사이에 숨겨져 있던 반지를 내 왼 손 약지에 끼우셨다.
반지에는 금으로 세공된 리시안셔스 장식이 있었고, 조그마한 다이아가 박혀 있었다.

"변치않는 사랑...꽃말도 알아 보신거에요?"

"당연하지." 다시 이어지는 키스. 방금까지만 해도 허무한 삶이라고 생각했는데, 병장님의 청혼 하나로 이렇게 생생한 삶이 돼버리다니. 내가 병장님을 사랑하게 된 건 언제나 흑백이던 내 세계를 컬러로 바꿔주신 점 때문이지 아닐까.

그 날의 내 일기장에는 보름달 아래에서 병장님께 평생을 약속 받았다는 이야기가 쓰여지게 되었다.